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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5-08-29 09: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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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후 마마, 어서 옥새를 내놓으십시오.”

“아니 됩니다. 519년 된 조선이 사라지는 이때,

어찌하여 백부님께서는 조약을 체결코자 하시는지요.

백성이 두렵지도 않으신가요.”

“황후 마마! 융희황제께서도 신들이 모두 가하다고 하니,

‘짐도 이의가 없소’라고 창덕궁 홍복헌 어전회의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어서 옥새를 내놓으시지요.”



치욕의 그날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일본정부 육군대신인 데라우치와 사이에서 이루어진 한일병탄의 소식을 병풍 뒤에서 듣고 있던 순종의 왕비인 효황후는 황제의 옥새를 치마 속에 감추었다. 그러나 효황후의 백부인 시종원경 윤덕영은 황후의 치맛자락을 들쳐내는 망동을 저지르면서 감추어둔 옥새를 빼앗아 한일병탄 조약에 날인하기에 이르렀다.


일제는 10월7일 한일합병에 공로를 세운 관료 76명에 대해 귀족의 지위를 수여했다. 이들이 받은 일왕의 은사금은 모두 605만엔(시가로 4천200억원)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중 김석진은 작위를 거부하며 자결했고, 조정구는 자결하려다 실패했다. 그러자 한규설, 홍순형, 민영달, 조경호, 윤용구, 유길준 등도 작위를 거부했다. 조의연은 자기가 죽거든 작위를 반환하도록 유언했고, 또한 김사준, 김윤식, 이용직, 김가진은 후일 독립운동과 3·1운동에 관여함으로써 작위를 박탈당했다.


1926년 병세가 악화된 대한제국의 마지막 융희황제는 ‘지난날의 병합은 일본이 나를 반역하는 신하들(이완용 등) 무리와 더불어 제 멋대로 선포한 것으로, 나를 유폐하고 협박한 것이노라. 만백성들이여, 노력하여 광복하라. 짐의 혼백이 어둠 속에서 여러분을 도우리라’는 유언을 남김으로써 한일병합에 따른 황제의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경술국치는 우리 민족에게 잊을 수 없는 날이다. 정든 고향을 떠나 연해주, 만주 등에 유랑하던 우리 민족들은 이날을 ‘대욕일(大辱日)’로 상기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건국기념일(개천절), 3·1독립운동 기념일과 함께 추념일로 이날 차가운 죽을 먹으며 치욕의 그날을 되새겼다.



우리 민족은 대일 항쟁기 동안 매년 8월29일이 오면 ‘국치일을 잊지 말자’는 격문 살포나 낙서 사건을 일으켰으며, 투옥된 독립운동가들은 국치일 단식동맹, 그리고 노동자들은 국치일을 상기하는 총파업을 계획하기도 했다.


이국땅 만주, 연해주 동포들은 ‘국치추념가’를 지어 부르며 뜨거운 일상의 식사를 거부하고 찬 죽을 먹으며 이날을 곱씹었다.지난달 광복회 연례행사로 독립운동가 후손 대학생들을 인솔하여 만주지역 독립운동 사적지를 답사했는데, 일제가 점령하여 만주괴뢰국을 세워 중국인과 간도지역에 살고 있던 우리 동포들을 생체실험 대상으로 학살하고 세계인에게 규탄을 받는 731부대와 항일의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동북열사기념관 등 어느 곳에 가든 ‘勿忘國恥(나라의 치욕을 잊지 말자)’의 글귀가 있었다.


예전에는 달력에 국치일이라고 표시되어 있었는데 요즘 달력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다. 우리는 승리의 역사도 기억해야겠지만 패배의 역사도 기억해야 한다. 전쟁도 치르지 않고 송두리째 빼앗겨 버린 나라가 105년 전에 있었다. ‘Never Forget, Never Forgive’는 역사를 부정하는 일본 아베정부를 대하는 우리의 역사관이 되어야 할 것이다. 

   

위 광복회 오상균 선생의 글을 읽다가 잊어버린 그 기억을 찬 죽에 말아 몸속으로 집어넣는다.


오늘이 경술국치 105주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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