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 기사등록 2017-01-06 14:34:04
기사수정


▲ 이소응 선생


[편집자 주] 이 달의 독립운동가는 대한민국 국가보훈처가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함께 선정하여 발표하는 한국의 독립운동가 명단이다. 국가보훈처에서는 1992년부터 매년 열두 명 이상의 독립 운동가를 각 월별로 지정하여 발표하고, 이들의 공훈을 선양하기 위해 추모 행사와 전시회 등의 기념 사업을 벌이고 있다. 이에 우리타임즈는 독립기념관 홍보문화부 사이버전략팀의 협조하에 이달의 독립운동가를 소개한다.


이소응(李昭應, 1852. 8. 7. ~ 1930. 3. 25.) 선생은 1852년 강원도 춘천시 남면 강촌에서 태어났다. 7세 때 처음으로 한문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22세 때 유중교(柳重敎)의 문하에 들어가 화서학파의 일원이 되었다. 


▲ 이소응 선생이 각 읍에 보낸 격문


1896년 1월 20일 춘천의병의 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각 읍에 「효고팔도열읍(曉告八道列邑)」이라는 제목의 격문을 보내 국모를 시해하고 단발을 강요하는 것을 꾸짖고, 나라의 원수들을 처단하기 위해 의병을 일으켰음을 밝혔으며, 1월 28일 개화정책에 앞장섰던 춘천관찰사 조인승(曺寅承)을 잡아 처단하였다. 


정부는 관찰사 처단 소식을 듣고 1개 중대를 급파하였다. 춘천의병은 2월 3일 가평에서 관군과 맞서 싸웠지만 패퇴하여 춘천으로 퇴각하였다. 이소응 선생은 지평군수를 찾아가 원병을 요청하였지만, 오히려 구금되고 말았다. 유인석 휘하에서 활동하던 정익(鄭瀷) 등에 의해 구출된 후 제천으로 내려가 유인석이 이끌던 제천의병에 합류했다. 


1898년 유인석을 따라 서간도로 건너가 통화현 오도구로 망명하였으며, 그 해 여름 함께 망명했던 동지들과 항일의지를 다지는 의체(義諦)를 약정하고, 10월 통화현 팔왕동(현 집안현 패왕조)으로 이주하고, 1900년 말 의화단의 난이 일어나자 유인석과 함께 귀국하여 원주로 돌아와 지내다가 1905년 공전리에 정착하였다. 이곳에서 화서학파의 존화양이(尊華攘夷) 정신을 담은 자양영당(紫陽影堂)의 건립에 참여했다. 


▲ 이소응 선생의 창의 숭모비


경술국치로 인해 더 이상 국내에 머물 수 없게 되자 1911년 서간도로 다시 망명하여 회인현 대황구에 머물렀으며, 1915년 관전현 문화사 만구로 이주하였다. 1927년에는 근대화의 물결을 피해 강평현 제7구 민가둔으로 이사하였다. 


이곳에서 존화양이의 의리를 지키며 살다가 1930년 79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이소응 선생의 유해는 1934년 제천으로 반장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활동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독립기념관(관장 윤주경)은 국가보훈처와 공동으로 독립운동가 이소응 선생을 2017년 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고, 공훈을 기리는 전시회를 2017년 1월 1일부터 31일까지 제5관·제6관 사이의 야외 특별기획전시장에서 개최한다. 


- 기간 : 2017. 1. 1. ~ 1. 31. (한 달간) 

- 장소 : 독립기념관 야외 특별기획전시장(제5·6관 통로) 

- 내용 : 춘천의병 의병장 이소응 등 9점

0
기사수정

다른 곳에 퍼가실 때는 아래 고유 링크 주소를 출처로 사용해주세요.

http://www.wrtimes.co.kr/news/view.php?idx=4303
기자프로필
나도 한마디
※ 로그인 후 의견을 등록하시면, 자신의 의견을 관리하실 수 있습니다. 0/1000
안성불교 사암연합회, 부처님 오신 날…
2024 안성미협 정기전
문화로 살기좋은 문화도시 안성
0.안성시 불공정 하도급 신고센터운영
'고향사랑 기부제'
한경국립대학교
임웅재 한영
만복식당
포토뉴스더보기
확대이미지 영역
  •  기사 이미지 경기도의료원 6개 병원 운영정상화 TF 위원회, ‘경기도의료원 운영 정상화 연구용역’ 착수보고회 진행
  •  기사 이미지 안성시, “청년 전용 온라인 플랫폼서 알찬 정보 얻으세요!”
  •  기사 이미지 안성시, '안성맞춤형 냄새저감 스마트 무창축사 표준모델' 준공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