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상호 작가[기고 = 송상호 작가] “됐고, 당신 자녀가 그 일을 당했다면 그렇게 판결하겠습니까?”
이 한마디는 짧지만, 지금 한국 사회의 분노와 무력감, 그리고 사법 불신을 모두 압축한 말이다.
최근 조희대 대법원장이 주심으로 참여한 판결(2017.11.9)이 다시 사회를 뒤흔들고 있다. 14세 여중생을 임신시킨 40대 남성에게 ‘무죄’를 선고한 판결이었다. 당시 대법원은 “피해자가 성관계를 거부하지 않았고, 명확한 강압이 없었다”는 이유를 들어 ‘강간으로 보기 어렵다’고 했다. 그러나 국민의 눈에는, 그 어떤 법리도 상식의 경계를 넘어선 비인간적 판결로 비쳤다.
법적 논리만을 말하는 사법부에게 국민은 “됐고”라고 말한다.
조 대법원장은 몇 가지 법적 논리를 들어 자신의 판결의 정당함을 설명했지만, 인간이라면 누구나 안다. 14세의 아이는 자기 몸을 지킬 힘도, 상황을 판단할 성숙함도 갖추기 힘들다는 것을. 그 상식이 무너진 자리에서 터져 나온 말이 바로 “됐고”다.
“됐고”란 말은 단순한 불만의 표현이 아니다. 그것은 법이 외면한 인간의 정의감이 최후로 던지는 일침이다. 국민은 법을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법이 인간의 편에 서 있기를 바란다. 하지만 이번 판결은 법이 상식과 정의를 등지고, 피고인의 권리만을 절대화한 듯 보였다.
그리하여 나는 딸을 둔 아빠로서,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조 대법원장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 “조희대 대법원장, 만약 그 피해자가 당신의 자녀였다면, 그때도 그렇게 판결하셨겠습니까?”. 이 질문은 사법부의 인간적 양심을 묻는 것이다.
법의 냉정함과 인간의 정의감 사이
물론, 법은 감정으로 움직여서는 안 된다. 감정이 판결을 지배한다면 법치는 곧 무너진다. 조대법원장의 판결에도 나름의 법리적 논리가 있었을 것이다. 법은 증거를 기준으로 판단하고, ‘합리적 의심의 여지’를 배제하지 못하면 무죄를 선고해야 한다는 원칙도 지켜야 한다. 그것이 문명사회의 최소한의 장치다.
그러나 법이 냉정해야 한다는 이유로 인간의 상식을 완전히 배제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정의의 언어가 아니다. 14세 소녀와 40대 남성의 관계를 “동의에 의한 성관계”로 보는 순간, 법은 현실의 인간을 버리고 추상적 문장 속에 숨어버린다. 그 냉정함이 잔혹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것이 정의를 위한 냉정함이 아니라 책임 회피를 위한 냉정함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 판결을 지켜본 국민들은 이렇게 한탄했다. “비슷한 상황이 생기면, 나의 딸도 그렇게 당할 수 있겠구나. 법이 법을 보호하기 위해 나의 딸을 보호하지 않을 수도 있겠구나”.
“됐고”의 양면성 — 분노의 정의감과 감정의 위험
한편 “됐고”라는 국민의 반응은 통쾌하면서도 위험하다. 그 말 속에는 분명한 정의감이 있다.
법이 막혀버린 자리에 감정의 도끼가 대신 내리친 것이다. 하지만 이 감정의 도끼가 언제나 옳은 방향으로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됐고”는 때로 사실보다 분노가 앞서는 위험한 언어가 될 수 있다. 법의 근거와 절차를 무시하고 감정만으로 유죄를 선언하는 사회는, 결국 또 다른 불의로 향한다. 우리가 진정 바라는 것은 감정의 복수가 아니라 정의의 회복이다.
그러므로 이 사안을 둘러싼 분노는 ‘조희대를 비난하는 감정’으로만 끝나서는 안 된다. 그 분노는 ‘법이 인간을 다시 바라보게 만드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법은 법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
조 대법원장은 아마 이렇게 말할 것이다. “판사는 증거와 법리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 감정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 그 말은 옳다. 그러나 국민이 던진 질문은 다른 차원에 있다. “그 법리가 인간을 지키고 있는가?” 이 물음에 답하지 못한다면, 그 법리는 이미 공허하다.
법은 인간 위에 군림하는 권위가 아니라, 인간의 삶을 보호하기 위한 약속이다. 그 약속이 깨질 때, 국민은 “됐고”라고 말하며 법을 다시 부른다. 그 말 속에는 법을 버리려는 의도가 아니라, 법을 다시 인간의 자리로 돌려놓으려는 절박함이 숨어 있다.
국민은 법이 법 자체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40대 남성이 14세 여중생을 임신시켰어도, 법의 논리로 무죄를 선고하는 것이 과연 정의로운가.
사법부가 잃은 것은 ‘권위’가 아니라 ‘공감능력’
대한민국 사법부가 지금 잃고 있는 것은 권위가 아니다. 공감 능력이다. 법관은 신의 자리에 앉은 존재가 아니다. 피고와 피해자, 국민 모두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을 때, 판결은 정의를 벗어나고 사법은 불신의 심판대에 오른다.
법의 냉정함이 인간의 눈물을 외면할 때, 정의는 법정이 아닌 거리에서 외쳐진다. “됐고, 당신 자녀라면 그렇게 판결했겠습니까?” 이 질문이 불편하다면, 그 불편함이야말로 법이 다시 인간의 자리로 내려와야 할 이유다.
사실은 사법부가 ‘공감능력’을 상실한 채 자신의 권위를 선택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국민으로부터 근본적인 신뢰를 잃었다. 조 대법원장이 주장한 ‘기속력(상급심이 내린 법리 판단을 하급심이 다시 뒤집거나 무시할 수 없다는 원칙으로서, 법적 안정성과 통일성을 보장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은 지켜졌지만, 국민의 상실감은 지켜지지 않았다.
법의 언어가 아닌 인간의 언어로
법은 언제나 논리의 언어로 쓰인다. 그러나 국민은 지금 논리보다 양심의 언어를 듣고 싶어 한다. 14세의 피해자에게 법은 너무 차가왔고, 판결문은 너무 낯설었다. 그녀의 상처는 ‘합리적 의심’이라는 말 한마디로 지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국민은 법의 언어 대신 “됐고”를 외친다. 그것은 미숙한 언어이지만, 동시에 가장 인간적인 언어다. 그 말이 사법부를 향한 거친 외침처럼 들릴지라도, 그 안에는 ‘법이 사람을 지켜달라’는 간절한 부탁이 담겨 있다.
사법부가 헌법 제103조-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를 들어서 ‘사법부 판단의 독립성’만을 주장하기보다, 그 문장 속의 ‘양심에 따라’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헌법 제103조가 말하는 ‘양심’은 단지 법리적 독립이 아니라 인간적 양심이기도 하다. 국민이 바라는 것은 법의 독립이 아니라, 그 법이 인간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독립이다.
“됐고”라며 등 돌린 국민의 맘을 어찌할 것인가.
조 대법원장은 대법원장이기 이전에 한 인간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부모이자 자식이다. 그 상식을 잃지 않는 한, 법은 결코 국민과 멀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 법은 멀어졌다. 법정은 냉정했고, 국민은 “됐고”라며 등을 돌렸다. 이것이 대한민국 사법부가 맞이한 가장 위험한 신호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묻는다. “됐고, 당신 자녀라면 그리 판결했을까?” 그 질문이 불편한 한, 아직 대한민국의 양심은 살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