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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6-07-06 23:3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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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대문형무소 투옥 중 이신애 선생 사진


[편집자 주] 이 달의 독립운동가는 대한민국 국가보훈처가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함께 선정하여 발표하는 한국의 독립운동가 명단이다. 국가보훈처에서는 1992년부터 매년 열두 명 이상의 독립 운동가를 각 월별로 지정하여 발표하고, 이들의 공훈을 선양하기 위해 추모 행사와 전시회 등의 기념 사업을 벌이고 있다. 이에 우리타임즈는 독립기념관 홍보문화부 사이버전략팀의 협조하에 이달의 독립운동가를 소개한다.


이신애(李信愛, 1891. 1. 20. ~ 1982. 9. 27.) 선생은 평안북도 구성 출신으로 일찍부터 근대교육을 받고 루씨여학교 두산리분교에서 교사로 재직하였다. 이곳에서 정춘수 목사와 손정도 목사를 만나 큰 감명을 받고 독립운동에 뜻을 두게 되었다. 


1919년 9월 서울로 올라온 이신애는 대동단에 가입했다. 1919년 10월 초순 경 대동단 수뇌부는 조직 본부의 상하이로 이전과 의친왕 이강의 상하이 망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거사를 준비하던 중 종로경찰서의 수사망에 걸려 11월 11일 이강을 비롯한 대동단 대표 일행이 만주 단둥역에서 붙잡혀 조직은 대부분 붕괴되었다. 


일제의 포위망을 탈출한 단원들은 대동단 지도부에서 추진 중이던 제2차 독립선언을 계속 추진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신애는 안교일에게 「독립선언서」의 인쇄를 의뢰하는 한편 뜻을 같이 할 동지들을 모으는데 주력하였다. 그리고 33명의 동지들과 함께 여성 대표의 자격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다.


이신애를 비롯한 단원들은 11월 27일 오후 5시 자동차에 나누어 타고 전단을 뿌리면서 독립만세운동을 거행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거사 당일 지정된 장소에 도착해보니 자동차가 오지 않아 집으로 돌아왔다. 김종진의 집에 모인 단원들은 거사의 실패를 분개하며, 다음날인 28일 오후 5시에 안국동 광장에서 만세운동을 거행하기로 약속했다.


▲ 대동단 2차독립선언서


28일 오후 4시 30분경 이신애는 박정선·정규식·박원식·이종진과 함께 안국동 광장에 모였다. 약속된 오후 5시가 되자 정규식이 먼저 태극기와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백기를 펼쳐 들고 만세를 선창하자 이신애 등도 선언서를 뿌리며 만세를 부르기 시작했다.


만세운동을 펼치던 대동단 단원들은 안국동 주재소의 경찰관들에게 붙잡혔다. 이들에 대한 취조와 예심은 지루하게 진행되었다. 이러는 가운데 1920년 3월 1일이 되었다. 이신애는 같은 동(棟)에 수감되어 있던 유관순 등과 함께 3·1운동 1주년을 맞아 옥중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이 사건으로 일본 경찰의 심한 고문에 시달렸다. 고막과 유방이 파열되는 고통을 받았으며, 나체로 신문을 받기도 하였다. 이후 경성지방법원에서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1년 6개월을 수형한 뒤 가출옥했다. 가출옥 후 행적에 관해서는 뚜렷한 기록이 없다. 


1945년 광복 후 이신애는 충남 공주읍 옥룡동에 거주하면서 한국부인회(韓國婦人會)를 조직하였고, 1947년부터 11년 간 부녀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말년에는 정부에서 마련해 준 대전시 문화동 집에서 남편과 함께 병고를 치르며 1982년에 일생을 마쳤다. 


1963년 대한민국 정부는 이신애 선생의 독립운동을 인정하여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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