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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2-09-27 12:2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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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영미 시인

[안영미의 봉당에 앉아서] 대낮에는 볕이 따갑다. 그늘에서 쉬노라면 하늘은 높고 바람은 시원하다. 여름부터 피우던 꽃은 마른 내를 품고 가벼워진다. 가을꽃은 색은 연하고 향기는 진하다. 바투 핀 꽃의 마음처럼 내 손도 바쁘다.


그냥 둘까 하다가 따면 누군가 먹어도 먹겠지. 밭으로 갔다. 고추도 들깨도 잎이 누릇누릇 물이 들고 있다. 아니 초록이 빠지고 있는 거라 해야겠다. 자라서 흰 꽃이 피고 가랑이에 고추를 매달던 싱싱한 초록을 본 증인이 나다. 그러니 물이 든다는 감상은 차치하고 환절기에 스러지는 식물성의 질서에 오히려 숙연하다.


가지는 늘어지고 매달린 고추는 병이 들고 잎은 퇴색되고 있다. 가을이면 더욱 탄력이 떨어지는 손으로 나는 가지를 젖히고 숨은 끝물 고추를 찾았다.

 

끝물은 작고 볼품없다. 빨갛게 익은 고추를 따 보면 태반이 병들었다. 뜨거운 여름을 건넌 것이 장해 어지간하면 땄다. 따다가 보니 파란 고추가 실한 것이 꽤 있다. 아마 늦더위 때문인 것 같다. 아직 병이 들지 않은 것이 많아 버리기 아깝다는 생각이 또 든다. 괜한 시간을 버리는 것은 아닌가 하다가 몇몇 얼굴이 스친다. 돈 주고 사 먹어야 하는 이들이다. 내 시간을 조금 더 쓰자.


환절기 비염을 앓고 있는데 고추 매운 내가 나니 쉴새 없이 재채기가 나온다. 끝물 고추 따다가 콧구멍 잘못되는 줄 알았다. 장갑을 벗고 코를 풀었는데도 얼얼하다. 끝물이라고 우습게 볼 일이 아니다. 냄새도 맵고 손끝도 맵다. 끝물도 고추는 고추다. 나는 명쾌하게 인정했다.


와우! 너 고추야.’

 

끝물로 노모는 고추장을 담았다. 고추장 색이 발갛게 그대로 있다고 작고 병든 고추를 가위로 일일이 발라 말리곤 했다. 차근차근 기억이 올라온다. 끝물도 쓸모가 분명하게 있다.

 

내가 나를 끝물이라 받아들이는 날, 오늘의 고추를 잊지 않겠다.



[덧붙이는 글]
작가 안영미 시인은 안성에서 나고 자랐다. 고향을 떠났다가 중년이 되어 돌아왔다. 세 아이를 키웠고 지금은 자유기고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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