잎이 사라진 나무
장화 속에 잠든 장화
파란홍차의 가을
보랏빛 벨벳 꽃
뱀 떼들이 숲속을 노린다
귀마개를 하고
마스크를 했다
아무 일 없는 듯 걸으니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
살아있는 게 실화였나
내가 나를 바라보며 웃었다
도넛구멍 속에 혀를 집어넣고
흰 새가 날아왔다
흰 새와 흰 전봇대와 흰 벽과 흰 그림자
벨벳 빛 눈이 펑펑 내렸다
끊임없는 외부 자극으로부터 우리는 자유로울 수 없다. 감각기관이 인식한 대상은 물론 의도하지 않아도 불균형의 감정에서 파생한 나무, 장화, 가을 그리고 뱀떼까지 연상되는 수가 있다. 하지만 시인은 자신의 심리 상태나 정신작용을 내면적으로 관찰하는 내성(內省) 단계를 넘어섰음을 알 수 있다.
흰색은 정체(停滯)를 내포할 수 있지만 흔들림이 없는 부동(不動)의 자세이며 흰새와 흰 벽, 흰 그림자는 내성(內省) 초월의 절대화를 상징한다. 가능태(可能態)와 현실태(現實態)의 경계를 오가는 물질세계에서 감각 교란을 일으키는 대상물은 "내가 나를 바라보며 웃는" 여백으로 둘 뿐이다. (박용진 시인/평론가)
송진 시인
1999년 『다층』 제1회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지옥에 다녀오다』 『나만 몰랐나봐』
『시체 분류법』 『미장센』 『복숭앗빛 복숭아』
반년간 문학지 『엄브렐라』 발행인
한국시인협회 회원, SPA창작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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