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연재> 작가 송상호의 <재미로 보는 안성이야기> - 30-12편 안성이 죽산보다 작을 때도 있었다고?
  • 기사등록 2021-08-05 09:31:39
기사수정
30회에 걸쳐 연재되는 <재미로 보는 안성이야기>는 2019년 9월에 출간되어 3쇄를 찍은 작가 송상호의 책이다. 그가 안성사람들의 자긍심과 안성의 미래를 위해 쓴 책 <재미로 보는 안성이야기> 총 30편의 이야기를 매주 1편씩 안성독자들과 나누고자 한다. 이 책은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읽도록 만들어졌으며, 안성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아야 할 내용으로 가득하다.[편집자 주]

 

▲ 송상호 작가

[송상호의 재미로 보는 안성이야기] 바로 다음 장에 가면 안성의 각 읍면에 대해 이야기 할 텐데, 굳이 한 장을 할애해서 죽산을 이야기하는 것이 형평성에 맞느냐고 하면 할 말이 없다. 


하지만, 이 장을 다 읽고 나면, 왜 내가 그랬는지 그대가 조금은 이해해주실 거다. 많이 이해해주시면 나야 좋고. 하하하하.

 

죽산이 원래 이리 컸었구나.

 

1장에서 봤듯이 안성은 첨에 백제 땅 이었다. 마찬가지로 죽산도 백제 땅이었고, 이름은 ‘개차산’이었다.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정책으로 인해 안성은 “내혜홀‘로, 죽산은 ’개차산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통일신라 시대 경덕왕 때는 안성은 백성군, 죽산은 개산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후 고려 초에는 ‘죽주’라고 하였다. 죽산에 가면 있는 ‘죽주산성’은 이때의 이름을 따서 지은 이름이다. 죽주는 역사적으로는 후삼국 시대에 궁예(고려 건국의 시초가 되었던 태봉을 세운 임금)가 처음 군사를 모아 혁명을 시작한 곳이기도 하다.


죽산 땅은 고려시대 1018년(현종 9)엔 경기도 광주에 속하기도 했다. 5장에서 본 대로 이때 안성 땅은 수주(지금의 수원)로 이속되었다가 바로 천안으로 이속되었다. 1226년(고종 13)에는 몽고군이 죽주산성을 공격하였다. 이때 방호별감 송문주 장군이 이를 격퇴하였다. 지금도 죽주산성에 가면 송문주 장군을 기념하는 사당이 지어져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죽산현(1413년 태종 13년)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따라서 죽주라는 명칭은 473년간 사용되었다. 안성은 죽주가 죽산현으로 이름이 바뀌는 1413년에 충청도 천안에서 경기도로 바뀌었고, 죽산은 그보다 21년 뒤인 1434년(세종 16)에 가서야 충청도에서 경기도로 소속이 바뀌었다.

 

1543년(중종 38)엔 도호부로 승격되었으며, 그 뒤 1895년(고종 32)엔 충주부 관할이 되었다가(이때도 잠시 죽산은 다시 충청도로 되었다), 다음해 경기도 죽산군이 되었다. 보았는가. 죽산도 안성처럼 경기도와 충청도를 오갔다는 것을. 죽산면이 아니라 죽산군이었다는 것을.

 

일제강점기가 시작되고 4년 뒤인 1914년엔, 행정구역개편 때 원래 죽산군 소속이었던 원일면ㆍ근삼면ㆍ원삼면ㆍ근일면 등이 용인군으로 편입되었고, 나머지 면이 안성군으로 편입되었다. 1992년에는 이죽면이 죽산면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이렇듯 죽산은 죽주에서 죽산현으로, 죽산현에서 죽산군으로, 마지막으로 죽산군에 속한 면이 나뉘어서 지금의 죽산면이 되었다. 이러한 역사를 알고 있는 죽산면민 들은 자신들의 과거의 영광에 대해 자부심이 대단한 듯 보였다.

 

공도가 원래 양성에 속한 거 였군.

 

이런 죽산면처럼 비슷한 길을 걸은 면이 바로 양성면이다.

 

양성은 고구려 시대에 안성이 ‘내혜홀’이었던 것처럼 ‘사복홀’이라고 불렀다. 신라 경덕왕 시절, 안성을 백성군이라고 이름 할 때, 양성은 적성이라 하였다. 고려시대 초기에 양성이라고 고쳤고, 안성이 수원으로 잠시 예속될 때, 안성과 함께 양성도 수원에 속하게 되었다.

 

1413년(태종 13)에 안성이 충청도에서 경기도로 이속 될 때 함께 경기도로 이속 되었다. 1895년(고종 32)엔 공주부에 속하는 양성군이 되었다. 보다시피 양성도 경기도에서 다시 충청도가 된 것이다.

 

다음 해에 바로 경기도 양성군이 되긴 했지만 말이다. 양성도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안성군에 편입되어 양성면이 되기 전까지 엄연히 안성군과 함께 양성군이었다는 것이다.

 

그거 아는가. 공도읍도 원래는 양성에 속했었다는 걸. 일제강점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양성현의 공제면·도일면·구천리면·구룡동면·덕산면·영통면의 여러 동리를 합쳐 공도면으로 바뀌었다. 이때 공제면과 도일면의 첫 글자를 따서 공도면으로 이름 하였다. 이후에 안성군에 편입된 공도면이 공도읍이 되었다.

 

‘죽산시 안성면, 양성시 안성면’이 되었을 수도.

 

근대와 현대에 안성의 융합의 역사를 요약하면 이렇다.

 

1895년엔 공주부 안성군, 양성군과 충주부 죽산군이 되었다. 1896년엔 경기도 안성군, 양성군, 죽산군이 되었다. 1914년엔 안성군, 양성군과 죽산군의 일부를 병합하여 안성군이 되었다.

 

1931년엔 읍내면을 안성면으로 바꾸었고, 1937년 7월 1일엔 안성면이 안성읍으로 승격되었다. 1963년엔 용인군 고삼면이 안성으로 편입되었고, 드디어 1998년엔 안성시로 승격되었다.

 

그러고 보면 지금의 안성은 전통적으로 내려온 죽산군과 양성군 그리고 안성군이 합쳐서 만든 도시라 할 수 있다. 지금은 ‘안성시 죽산면, 안성시 양성면’이라고 하지만, 역사가 뒤바뀌었다면, ‘죽산시 안성면, 양성시 안성면’이라고 했을 수도 있었다.

 

안성이 죽산이나 양성보다 크고 잘나서가 아니라, 단지 역사의 흐름이 지금의 모습을 만들어 놓았을 뿐이다. 알 수 없는 게 역사이고 운명인 듯하다. 사실 그 옛날엔 죽산이 안성보다 더 컸었던 때도 있었다.

 

이렇듯 안성의 역사는 양면의 역사가 있는 듯하다. 삼국시대에는 외부세력에 의해 이리 치이고 저리 치였고, ‘이인좌의 난’ 때는 본의 아니게 외부세력에 휩쓸려 고난을 당했다.

 

이에 순수한(?) 안성사람끼리 뭉쳐보자며 순수혈통(?)을 외쳤지만, 삼국시대엔 국가정체성이 수시로 바뀌었으며, 역사적으론 경기도와 충청도를 넘나들었고, 근대에 와서는 도시의 구성자체가 안성군, 양성군, 죽산군 등이 융합한 모양새다. 


굳이 ‘안성사람과 외지인’을 구분 짓는 일부 안성의 정서가 무색할 정도다.  


[덧붙이는 글]
저자 송상호는 안성에 이사 온 지 20년차다. 2001년 일죽에서 ‘더아모의집(더불어 사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가는 모임의집)’을 열었으나, 텃새로 인해 보금자리에서 세 번 쫓겨나는 아픔을 겪었다. 2005년부터 안성신문 등 각종 신문에 기자로 활동했고, 지금은 금광면 양지편마을에서 마을주민과 어울려 살면서 글을 쓰고 있다. 그동안 지은 책으로는 <19금을 금하라> 유심 | 2018.10.19, <더불어 바이러스> 유심 | 2017.01.18, <그래도 종교가 희망이다> 유심 | 2016.05.31, <모든 종교는 구라다> 개정판, 유심 | 2015.08.31, <당신의 결혼은 안녕하십니까> 유심 | 2015.08.31, <자녀 독립 만세> 삼인 | 2013.03.19, <욕도 못하는 세상 무슨 재민 겨> 자리 | 2012.05.07, <우리 아이 절대 교회 보내지 마라> 자리 | 2011.07.20, <예수의 콤플렉스> 삼인 | 2011.06.30., <학교시대는 끝났다> 신인문사 | 2010.07.26, <모든 종교는 구라다> 자리 | 2009.06.30, <문명 패러독스> 인물과사상사 | 2008.12.26 등 총 11권의 책이 있다.
0
기사수정

다른 곳에 퍼가실 때는 아래 고유 링크 주소를 출처로 사용해주세요.

http://www.wrtimes.co.kr/news/view.php?idx=17599
기자프로필
나도 한마디
※ 로그인 후 의견을 등록하시면, 자신의 의견을 관리하실 수 있습니다. 0/1000
안성불교 사암연합회, 부처님 오신 날…
2024 안성미협 정기전
문화로 살기좋은 문화도시 안성
0.안성시 불공정 하도급 신고센터운영
한경국립대학교
만복식당
설경철 주산 암산
넥스트팬지아
산책길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