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상호의 재미로 보는 안성이야기] ‘아! 저 놈들만 쳐들어오지 않았어도 우리끼리 편안하게 잘 사는 건데. 믿을 놈 하나 없다. 우리끼리 뭉치자. 우리 가족과 우리 몫은 우리가 지킨다’.
이 대사를 기억하는가. 3장(안성이란 이름에 그렇게 깊은 뜻이)의 거의 마지막 부분에서 내가 한 대사다. 삼국시대에 고구려, 백제, 신라 때문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인 안성사람들의 심정을 대변한 말이다. 이런 일이 조선시대에도 또 일어났다. 바로 ’이인좌의 난‘이다.
안성에서 거병한 이인좌의 난.
이인좌란 사람이 역모의 주인공이었으므로, ‘이인좌의 난’이라고도 하고, ‘무신년’에 일어났다고 해서 ‘무신란’이라고도 한다. 도대체 무신년에 무신 난이 일어난 겨?
이 난의 배경은 조선시대 당파싸움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그 놈의 당파싸움이 문제다. 소론(요즘말로 말하면 더불어 민주당, 자유한국당과 같은 당 이름)이 지지했던 경종이 임금이 되었을 때, 노론(소론의 반대당)은 경종을 인정하지 않았고, 자신들의 임금을 세우려 했다. 그가 바로 연잉군(훗날 영조 임금)이었다. 이것이 들키자 노론은 권력에서 밀려났다.
1724년 경종의 죽음으로 영조가 즉위했다. 권력에서 밀려났던 노론은 다시 영조의 등을 업고 권력을 잡았다. 당할 만큼 당한 노론이 소론을 괴롭힌 건 어쩌면 당연했다. 억눌리던 소론파 사람들은 틈만 있으면 역전을 노렸다. 아니 역적(질)을 노렸다. 더군다나 경종의 죽음이 노론파의 독살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반역의 불씨는 커져만 갔다.
소론파는 비밀결사대를 만들어 D-day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 영조와 노론파도 이 사실을 어느 정도 감지하고 있었다. 다만 증거가 없어서 기다리고 있었다. 서로 팽팽한 긴장감 속에 서로를 주시하고 있었다.
이 때 선수를 친 것이 이인좌를 비롯한 소론파 사람들이었다. 이인좌는 안성과 양성에서 거병했다. 그는 1728년 3월 15일, 상여를 맨 장례행렬처럼 위장하여 군사를 몰래 이끌고 청주성을 공격했다. 충청병사 이봉상, 영장 남연년, 군관 홍림을 죽이고 청주성을 함락했다.
이 소식을 들은 정부군은 난리가 났지만, 소론파 사람들은 전국 각지에서 이인좌의 군사와 합류하려고 군사를 일으켰다.
이인좌는 죽산농민 신길만의 신고로 붙잡혔다.
청주성을 점령한 반란군은 영조가 있는 궁궐로 진격했다. 이때, 반란군은 한양으로 가기 전에 먼저 안성과 죽산으로 진격했다. 왜 그랬을까. 바로 한양으로 진격했어도 되었을 텐데. 그건 안성에 이인좌와 함께 하는 소론파 사람들이 많았다는 이야기다.
일단 반란군은 안성으로 진격해 안성고을 수령들을 자기편으로 만들어 군사의 수를 늘리려 했다. 왜냐하면, 처음 군사를 일으킨 곳이 안성이 아니던가.
한양으로 가려던 반란군은 3월 24일 안성에서 오명항의 토벌군과 마주했다. 이때 오명항은 한 가지 계략을 섰다. 토벌군이 안성이 아니라 직산으로 향했다는 거짓정보를 반란군에게 흘렸다. 이 거짓정보에 속은 반란군은 오명항의 부대가 중앙군이 아니라 동네 읍병 정도로 오해했다. 반란군은 상대를 얕보고 총 공격을 했다. 이 계략에 밀린 반란군은 화포와 총기에 벌집이 되어 수백 명이 죽었다.
이 반란을 주도했던 이인좌는 어찌 됐을까. 패배하여 산에 있는 절로 달아나다가 죽산에 살던 농민 신길만에게 잡혔다. 한양으로 압송되어 사지가 찢기는 능지처참 형을 당해 죽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농민 신길만은 그 공으로 1천 냥의 은과 2품 관직을 받았다.
명색이 ‘이인좌의 난’이지만, 이인좌가 죽고도 호남과 영남에선 ‘이인좌의 난’이 계속 이어졌다. 우습게도 ‘이인좌의 난’이라는 표현이 무색하게, 제일 많은 고을을 점령하고 제일 오래 버틴 건 경상도의 정희량이었다. 하지만 정희량의 군대도 토벌군에 의해 토벌되고, 정희량은 죽임을 당했다. 이로써 ‘이인좌의 난’은 끝났다.
“우린 안하려고 했는데, 쟤가 부추기는 바람에 그만”
이인좌의 난과 안성의 연관성은 무엇일까. 바로 그렇다. 이인좌의 난이 시작된 곳이 안성이었다는 것. 역모의 근원지 역할을 한 안성이 무사할 리가 없다. 역모에 가담한 양반들은 줄줄이 비엔나처럼 엮여서 죽임을 당하고, 가문은 망하는 길로 들어섰다. 조선시대엔 역모에 가담하면 가담자뿐만 아니라 가담자의 가족과 가문을 싹 망하게 만드는 게 법이었다.
역사적 자료에 의하면 이인좌의 반란군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곳은 사실 안성보다 평택 진위에 사는 양반들이 많았다. 그 다음으로 안성과 양성양반들이었다. 이러니 안성에 피바람이 얼마나 불었을까. 사실 역모에 크게 관련이 없다 해도 근처에 살았거나 관계를 맺었다는 이유로 벌을 받기 마련이다.
사실 이 참사에서 안성이 억울한 면이 없지 않았다. 이인좌는 안성 사람이 아니었다. 다만 자신의 군사반란을 안성을 중심으로 시작했을 뿐이다. 중앙의 당파 권력 다툼으로 인해 생긴 반란이었다. 그런 권력 다툼을 한양에서 하지, 굳이 평화롭게 사는 안성으로 와서 군사를 모으고 지랄이었느냐 말이다. 결국 피해는 아무 것도 모르던 안성사람들이 당한 꼴이 되었다.
이후에 한양 중앙정부에선 안성을 ‘반역의 도시, 반역의 성’이라고 예의주시했다. ‘한 번 반역한 곳은 또 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으리라. 그 덕분에 안성사람들은 여러 방면으로 어려움을 당했다. 당대에 뿐만 아니라 후대에도 그런 어려움이 이어졌다.
안성사람들은 삼국시대에 당했던 ‘트라우마’를 떠올렸고, 또 한 번 더 속으로 외쳤다.
‘아! 저 놈들만 쳐들어오지 않았어도 우리끼리 편안하게 잘 사는 건데. 믿을 놈 하나 없다. 우리끼리 뭉치자. 우리 가족과 우리 몫은 우리가 지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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