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상호의 재미로 보는 안성이야기] 이것도 안성역사다. 2019년 1월 23일에 보도된 ‘내혜홀 광장 사건’ 말이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 바로 ‘내혜홀 광장 친북 논란 사건’이다.
내혜홀 광장이 졸지에 북한 광장이 될 뻔?
사건은 이랬다. 2004년 석정동에 7천784㎡ 규모의 부지에 총사업비 81억 원을 투입해 축제와 공연, 장터, 행사 등은 물론 주민들의 휴식을 위해 안성시가 내혜홀광장을 만들었다. 마치 서울에 있는 광화문 시민광장처럼. 여기까진 좋았다. 2015년에 낡은 보도블록을 다시 깔기 전까지는.
보수 성향의 시민단체 자유대한호국단이 '경기도 안성시가 인공기(북한 국기)를 품고 있다'는 제목의 글을 SNS와 온라인에 올리면서 문제가 되었다. 내혜홀 광장에 있는 보도블록 별 문양이 북한의 인공기를 닮았다는 거였다. “시민들이 휴식을 즐기고 각종 행사도 열리는 공간인데 인공기 모양의 시민광장이 웬 말입니까! 여기가 북한입니까?”란 내용과 함께 내혜홀광장의 위성사진이 올라왔다. 이 글을 읽는 당신도 그 위성사진을 한번 쯤 보았을 거다.
안성시청은 다음 날 급히 세금 400만원을 들여 별 문양 보도블록을 없애고, 다른 보도블록을 까는 것으로 일을 해결했다. 21세기 내혜홀광장에 그런 일도 있었다며 훗날 에피소드로 남겨질 일이다.
내혜홀이 고구려 고을. 거기서 통일음악회라!
여기서 잠깐! 내혜홀이 원래 고구려의 고을이름이라는 것은 좀 있다 나온다. 그렇다면 내혜홀은 고구려 땅이었다는 이야기. 고구려는 지금의 남한 쪽이 아니라 북한 쪽이다. 우연히 생긴 에피소드겠지만, 역사는 돌고 돈다 했던가. 한반도의 통일을 염원하는 안성평화음악회가, 안성최초로 2019년 7월5일에 내혜홀광장에서 펼쳐진 것도 우연은 아니리라. 내혜홀광장이 남북통일의 상징적인 곳이 될 수도 있다고 하면 비약일까.
서울에 ‘스카이 캐슬’이 있다면, 안성엔 ‘화이트 캐슬’.
내혜홀을 컴퓨터에서 검색해보면 ‘경기도 안성 지역의 옛 지명’이라고 나온다. 그렇다. 내혜홀은 안성의 옛 이름이다. 옛날이라면 고구려로 거슬러 올라간다. 삼국시대 고구려의 고을 이름 중 하나였다.
사실 그전 삼한시대에는 내혜홀 땅은 마한에 속했다. 이후 백제 비류왕 초기에는 안성천을 경계로 마한과 국경지역을 이루며 백제의 중요한 군사기지가 되었다. 그 뒤 369년(근초고왕 24)백제가 마한 전역을 소유하게 될 때까지도 백제의 영토였다.
그 뒤 고구려 장수왕이 한강 이남의 백제 영토를 점령하였다. 고구려가 중앙집권적 제도를 실시할 때부터 양원왕 때까지 내혜홀로 불렸다. 사실 내혜홀 이전 시대엔 안성 땅은 내세울만한 이름이 없는 듯 보인다. 신라의 삼국통일 후 757년(경덕왕 16) 지방제도가 개혁될 때 백성군(白城郡)으로 개칭되었다.
여기서 잠깐! 백성? 왠지 친숙한 이름이다. ‘백성초등학교, 백성운수’할 때, 그 백성이 바로 이 백성이다. 한자로 말하면 白城 즉 ‘WHITE CASTLE’ 이다. 서울에 ‘스카이 캐슬’이 있다면, 안성엔 ‘화이트 캐슬’이 있다. 하하하하.
‘안성’이란 이름은 고려시대 태조 왕건 때 지었구나.
하여튼 문무왕 때 당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신라군과 당나라 군사가 이곳에서 싸워 신라군이 백성으로 후퇴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 태조 때 지금의 안성(安城)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안성현에서, 1362년(공민왕 11) 안성군으로 승격하여 오늘에 이른다. 지금 우리가 안성이라고 부르는 것은 고려시대 1대 임금 태조 왕건 때가 시초라는 걸 잊지 말자.
1361년 고려시대 공민왕 때엔 글쎄 홍건적(머리에 붉은 수건을 둘러 표를 했으므로 홍건적이라 했다. 몽골족이 세운 원은 중국 내지를 다스렸는데, 13세기 전반에 이르러 몽골족에게 통치 받던 한족들이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했다)이 이곳을 침범하기도 했다는 걸 아는가.
홍건적의 침입으로 왕이 안동으로 피난하는 국난을 당했을 때, 양광도(지금의 경기도)의 다른 고을은 모두 항복했지만, 안성사람들은 적에게 거짓으로 항복하여 주연을 베풀어 적장을 유인한 후, 적장 6명을 참수했다. 그 덕분에 송도를 회복하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다. 안성이 무려 이런 곳이다. 암튼 그 공을 기려서 안성에 극적루를 세웠다. 극적루? 지금 시청 앞 봉산로터리에 있는 바로 그 극적루가 복원한 극적루다.
하여튼 ‘내혜홀’이란 이름이 안성의 정신을 형성하는 데 어떤 역할을 했는지, 이 책 내내 곱씹게 될 것이다. 또한 3장에서 나오겠지만, 사실 지금 본 파란만장한 안성 역사와, 안성이란 이름의 역사적 의미와 직접 통한다. 기대해도 좋다.
다른 곳에 퍼가실 때는 아래 고유 링크 주소를 출처로 사용해주세요.
http://www.wrtimes.co.kr/news/view.php?idx=167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