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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8-10-25 20: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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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은 하늘에 맹세코 첨부터 그러려고 그런 건 아니다.

 

▲ 마을 최고령 정영남 엄니와 필자(송상호)


24일 아침에 우리 애마를 타고 출근하는 아내가, 마을길가 고추밭에서 고추를 따시는 마을엄니(울 마을 최고령 팔순엄니)에게, 오늘따라 차를 세우고 인사를 한다. 그러곤 순식간에 아내의 차는 꼬리를 감춘다.

 

이때까진 평범한 일상이다. 그 엄니가 나를 부르기 전까진 말이다. 아내를 배웅하는 나를 그 엄니가 부르신다.

 

"일루 와서 고추 좀 따가셔"

 

헉! 순간 머리에 ‘빅 픽처’아닌 ‘빅 픽처’가 필름처럼 스치고 지나간다. 마치 ‘부부 조작단’이 만들어낸, 우연을 가장한 조작인 듯 되어버렸다. 아내는 인사를 해서 판을 깔아놓고 사라진다. 남편은 아내를 배웅하는 것처럼 끝까지 바라보면서 마을 엄니의 눈에 들어오게 만든다. 그 엄니가 남편을 보면서 “고추 좀 따가”라고 손짓을 한다. 남편은 못 이긴 체 머쓱해하며 고추를 딴다.

 

이렇게 시작된 ‘고추 털어오기’ 아니 ‘고추 따기’가 시작되었다. 우리 마을에서 최고령이신 마을 엄니와 말이다.


그 엄니는 자신의 집에 가져갈 고추를, 나는 우리 집에 가져갈 고추를. 엄니는 빨간 고추와 빨갛게 물들어 가는 고추를 따고, 나는 주로 풋고추를 땋다. 그 엄니가 빨갛게 익힐 고추를 따고 지나간 자리에 남은 풋고추를 내가 따는 형국이다. 엄니는 익은 고추를, 나는 풋고추를 따는 게다. 흡사 ‘고추 따는 모자’라고나 할까.

 

그때까진 몰랐다. 아내와 내가 조작 아닌 조작으로 ‘고추 따기’를 하게 된 줄 알았다. 아니었다. 그 엄니가 말씀하셨다.

 

“사실은 읍내 사는 동갑내기 친구에게 오늘 고추 따러 오라니께 병원 신세 지느라 못 온다고 하자녀. 그래서 심심할 줄 알았더니.......근디 얘들 아빠랑 이야기 나누면서 따니께 심심하지 않아 좋구먼”

 

▲ 그 엄니가 나에게 고추를 따가라고 한 속내(?)는 당신이 고추를 따실 때, 말벗을 두기 위함이었다.(우리 마을 정영남 최고령 할머니)

그......그랬다. 그 엄니가 나에게 고추를 따가라고 한 속내(?)는 당신이 고추를 따실 때, 말벗을 두기 위함이었다. 말하자면 친구 분 대타(?)였다고나 할까. 평소 마을회관에서도 나를 보면 반가워하시며, 뭐라도 챙겨주시려고 하고, 나랑 대화를 하시기를 즐겨하던 엄니였다. 물론 엄니는 그리 아니해도 고추를 따가라고 하셨을 거라는 건, 나도 알고 엄니도 아는 바다. 어쨌거나 아무려면 어떠랴.

 

상상해보라. 먼 산엔 단풍이 물들어가고, 마을 논은 가을걷이가 끝나 한가롭고, 하늘엔 가을구름이 내려다보는데, 그 마을에서 최고령 할머니와 그 마을에서 최연소 얘들 아빠가 둘이서 고추를 따며 수다를 떨고 있는 모습을.

 

엄니는 ‘당신의 손자가 손자며느리 될 사람을 데려 왔는데 병원 간호사라는 둥, 사실은 이웃 마을에 젊은 처자가 맘에 더 드는 데 손자가 거들떠도 안 본다는 둥, 미국에 가서 사는 아들네가 한국 한 번 오려면 비행기 값만 해도 엄청 든다는 둥, 우리 마을 누구누구 네가 어떻다는 둥’ 하시면서 수다가 끝이 없다.

 

“(더 이야기 하고 싶은 맘을 담아) 오늘은 아직 안 나간 겨? 언제 가는 겨?”

“(더 따고 싶은 맘을 담아) 아 네. 엄니! 오늘은 오후에 나가유”

“(계약이 합법적으로 성사되었다는 맘으로) 그랴. 그럼 시간 좀 있네. 많이 따 가. 어차피 서리 내리면 데쳐져서 버려야 헝게”

“(그 계약에 동의하는 맘으로) 아~~네...”

“(그 계약이 효과적인지 확인하는 맘으로) 근디. 이거 얘들 엄마가 좋아하려나. 괜히 많이 따왔다고 뭐라 하지 않것어?”

“(그 계약이 충분히 효과적임을 확인시키는 맘으로) 아 아녀유. 얘들 엄마도 이거 먹고 싶다고 노랠 불렀시유.”

 

그랬다. 사실 이제야 털어 놓지만, 아내는 이 밭을 지날 때마다, “저 풋고추를 먹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었다.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 했던가. 꿈은 이루어진다. 만만세!!

 

시골에 살면 마을어르신들이 가끔 그러신다. “얘들 엄마, 얘들 아빠! 밭에 있는 이것저것 채소를 좀 따가. 내가 시간이 없어서 못 따주니 께 말이여”라고들 하신다.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쉽나. 주인도 없는 밭에 들어가 어찌 따온단 말인가. 아무리 허락을 하셨다고 해도 쉽지 않다.

 

아무튼 엄니와 말하다보니 어느새 오전 내내 고추를 따고 있다. 집에 갖다 놓고 또 따고 해서 모두 3포대나 땋다. 엄니가 말씀을 계속 하시니 어디서 끊어야 되나 속으로 고민하고 있는데, 12시가 넘어가니 엄니가 말씀하신다.

 

“오후에 나가야 되는 거 아녀?”

“(이때다 싶어서). 아 네 맞아유.”

 

이렇게 오전 내내 딴 고추를 집에 있는 다라에 쏟아 놓으니 엄청 많다. 자신이 출근 한 후,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그 엄니에게 인사를 한 후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곤 상상도 못했을 아내에게, 사진으로 찍어서 당장 톡을 보냈다. 기쁜 소식이라며 보냈더니, 아내는 그냥 기쁜 소식이 아니라 엄청난 기쁜 소식이라며 전화가 왔다. 아내의 목소리가 완전 청량하다.

 

▲ 그런데 이 많은 고추를 어떻게 쓸까. 그렇다. 아내와 나의 이심전심, 그것은 주위의 사람들과 나눠 먹는 거다.

그런데 이 많은 고추를 어떻게 쓸까. 그렇다. 아내와 나의 이심전심, 그것은 주위의 사람들과 나눠 먹는 거다. 아내가 ‘봉지봉지’ 만들어 주위 사람들에게 나눠 줄 게 분명할 거라 믿고 고추를 많이도 땋다.

 

사실 그래서 아내와 나는 어제부터 계속 행복하고 있다. 앞으로 며칠은 고추로 인해 행복할 예정이다. 그 고추를 봉지로 전해줄 수 있어 고맙고, 그 사람들의 감사인사에 고맙고, 고추를 된장에 푹 찍어 먹을 수 있어 고맙고, 그 엄니의 말벗이 되어준 대가로 고추를 얻을 수 있어 고맙다. 좀 전 아내가 미소를 지으며 내게 들려준, 며칠간 듣게 될 신난 아내의 승전보가 이렇다.

 

“여보. 오늘도 아무개에게 이 고추를 건네 줬더니, ‘어머나 이 고추 맛있게 생겼다’며 말하는 거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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