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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2-12-19 18:3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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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영미 시인

[안영미의 봉당에 앉아서어디서 턱 받치고 있다가 들이닥친 것일까. 숨어있던 거니? 추위라는 너. 폭설이 겸하니 세상은 꽁꽁 얼었다.

 

12월 들어서자 언제 푸근했냐는 듯 추위가 맹위를 떨치고 있다. 낡은 지붕을 하얀 눈이 덮어 낡음이 화사해졌다. 시리다거나 차갑다거나 춥다는 말을 옹송그린다거나 웅크린다는 말로 매치하지 않기로 한다.

 

쉬면서 단단해지고 있다고 믿는다. 시리고 차가운 맛을 본 배추가 달고 시금치 맛이 진하듯 만물이 조금 더 진솔해지는 중이다.

 

김장한 지 보름이 지났다. 자연 온도에서 숙성하는 것이 났다는 생각에 외양간이었던 창고에 두고 있었다. 날이 추워지자 안으로 들였다. 봉당을 내어 만든 공간이다. 맛이 들기를 기다리고 있다. 얼지는 않고 아직 맛이 그대로다. 저장고가 따로 없다. 두는 곳이 저장고다. 썩지 않고 상하지 않는다. 겨울은 썩지 않는 계절이다.

 

온돌에 앉아 뒷산 숲에서, 옆집 밭에서, 우리 마당에서 온갖 풀씨가 꼬물꼬물 씨방을 오므리는 상상을 하고 있으려니 내 몸이 간질간질하다. 꼭꼭 여미다가 쑤욱 밀면 세상은 다시 따뜻해질 것이다.

 

나는 이 겨울에 어떤 씨앗을 여미고 있는 것일까. 한 해의 마지막 달이니 몇몇 마무리해야 하는 일에 마음을 쏟았다. 잠시 내 안에 나를 끄집어내 물끄러미 본다. 우두커니 서 있는 12. 12월처럼 서 있는 나. 조금 더 가늘어진 머리카락에 마음이 가는 이유다. , 어떤가. 12월은 겨울이고 겨울은 썩지 않으니 12월처럼 서 있어도 괜찮다.

 

한여름에 태양을 실컷 잡아먹은 늙은 호박을 잘랐다. 8월이 벌겋게 나타났다. 9, 10월을 차례로 대면하고 씨앗을 발라냈다. 씨앗이 겨울을 품을 것이다. 그래야 12월처럼 잘 설 테니. 조각조각 태양을 써는 마음으로 늙은 호박을 잘랐다. 먹으려면 실컷 먹는 것이 맞다. 늙은 호박의 싱싱한 주홍빛이 아름답다.

 

부글부글 호박죽을 끓였다. 소금간만 했는데도 달다. 한여름 태양은 겨울이면 달다. 마치 이제야 아는 것처럼 한 숟갈 입에 넣고 눈을 감고 맛을 음미한다. ! 이 뜨거운 한여름 맛! 12, 겨울에 만나는 여름이라니. 내 몸이 후끈하다.

 

낡음이 화사해진 지붕 아래 온돌이 있다. 나는 스웨터를 걸치고 온돌에 앉았다. 바닥이 따뜻하다. 깔아놓은 이불로 다리를 덮는다. 양손을 엉덩이 밑에 넣고 잠시 눈을 감는다. 마치 둥지에 앉은 겨울 텃새 같다. 간헐적으로 옆집 개 짖는 소리만 난다.


[덧붙이는 글]
작가 안영미 시인은 안성에서 나고 자랐다. 고향을 떠났다가 중년이 되어 돌아왔다. 세 아이를 키웠고 지금은 자유기고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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